1969년 4월
EC 121의 임무는 일본 아쓰기 기지에서 발진해서 블라디보스톡까지 북상 한 뒤 태평양함대의 동태를
탐지 후 동해를 따라 남하하면서 북한 연안을 점탐 후 귀환 하는것이었다.
쏘련이나 북한 모두 동해를 휘젓고 다니는 미 정찰기가 못 마땅했지만 현실적인 요격수단이 없었다.
동해 어랑기지에 미그15가 있었지만
연안으로 부터 150km 떨어져 비행하며 탑재 반경이 400km에 달하는 신형APS-95 레이더로 북한 공군의 출격
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있었기에, 속도가 느린 미그15가 이륙하면 즉시 안전지대로 피할 시간이 있었다.
이에 북한공군 에이스출신 김기옥은 미그21이면 가능하다는 판단 후, 미 정찰위성의 감시를 피해 평양근처의
미그21 두대를 분해 후 열차편으로 동해 어랑기지로 보내 위장 막 안에서 조립한다.
조립은 했지만 문제는 발진이었다. 활주로가 800m는 돼야 하는데 어랑은 600m에 불과했다
기관포를 제거하고 AA-8 공대공미사일 한발,연료350갤런 외에 불필요한 장비는 모두 제거했다.
이륙을 하더라도 접근이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고성능 레이더를 피해서 접근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더구나 미그21은 연료탱크가 앞에 있어 150갤런 정도의 연료는 남겨놔야 안정적 자세를 유지
할 수 있었고 공중기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할때 각 기에서 요격 가능 시간은 길어야 5분이었다.
이륙에 성공한 미그기는 급강하 수면에 닿을 정도로 초저공비행 후 청진 남동쪽150km 지점에서 급상승
EC-121 바로 밑까지 접근후 미사일을 발사했으나 첫발은 실패, 두 번째 미사일이 명중했다.
31명의 승무원을 태운 미 정찰기는 동해로 추락했다 4월15일 오후 3시55분.
김일성의 생일 이었다.
사건 후 미국은 항모 보내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 흐지부지.
명예로운 베트남전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당선된지 3개월된 닉슨은. 통킹만 사건의 재판과 같아 보이는
이사건이 전면전으로 확산돼는게 부담스러웠다.
나중에90년대 밝혀진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 12~16 군데 정도에 전술핵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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