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박황희선생님 글입니다.
어수와 기독교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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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유신론자다. 우주는 빅뱅이 되었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조물주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고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의 시원에 대한 존재의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혹은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예수회의 신학자 카를 라너의 주장이다. 그리스도의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한다. 비기독교인 중에도 그리스도에 의한 신의 구원적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선량한 이교도(Virtuous pagan)’는 기독교 신학 내 개념으로, 복음 전도를 받지 못하여 살아생전에 그리스도를 알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선량한 삶을 살았던 이교도들이 이로 인해 영벌에 처하게 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보아 제기된 문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들의 가치와 진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은혜는 타종교를 대체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성취한다고 하였다.
카를 라너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타 종교에도 현존하며, 타 종교인이어도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신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몰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를 라너가 언급한 이 하느님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다. 하인츠 로베르트 슐레테는 카를 라너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모든 종교는 구원의 통상적인 길이고, 교회는 구원의 특별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지중해의 성자로 알려진 다스칼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지옥이니, 영원한 벌이니 하는 말은 성직자들이 헌신적인 신도들을 겁주어 복종시키기 위해 날조한 잔인하고 포악한 교리이다. 이러한 교리는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교회에서 찬양하는 ‘자비롭고 인애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신은 벌을 주지 않으며 자신의 왕국에서 인간들을 내쫓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 거친 물질세계, 분리의 세계에 오게 된 것은 지상의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고 영적 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을 신께서 들어주신 것이다.”
예수는 구약의 오류를 질책하였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하늘을 독점할 수 없다. 예수는 하늘을 독점하려는 유대교의 오만을 꾸짖었다. ‘야훼의 율법’에만 의존하는 유대인에게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신성을 깨우치고 누구나 신의 자녀로서의 거듭남을 강조하였다. ‘신성의 존재’가 본질이다. 예수가 강조하는 구원은 이 땅에서 천국을 구현하는 ‘중생’의 삶이었다. 실천적 행위 없어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보장성보험’ 같은 논리는 바울이 창안한 교리일 뿐이다. 나는 교조주의자들의 신념을 결코, 믿지 않는다. 진리는 예수의 말씀이지 바울의 교리가 아닌 까닭이다.
예수가 바라는 삶은 ‘현실의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원했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지, 불의에 저항하여 고난받는 인생이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은 다음의 천국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이 땅에서의 변화된 삶이다. 우리가 굳게 믿어야 할 것은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 아니라 ‘인간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신’이다. 그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만사형통의 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러 온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본령은 절대 ‘믿음’이 아니다. 오직 ‘거듭남’이다. ‘중생(重生)’이란 죽음을 통과한 생명의 세계에 눈을 뜨는 것이다. 예배나 봉사 등을 통한 종교활동에 열심을 냈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생에 대한 깨달음과 변화 없이 교회 생활에 열심을 냈다는 것은, ‘종교동호인들의 친목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개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란 애초에 성립이 불가한 언어도단이다. 이타적 사랑이 배제된 개인의 구원은 그 자체가 난센스요 기복일 뿐이다. 예수의 출현 자체가 불의한 세상을 바꾸려는 ‘사회 구원’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를 믿고 ‘절대 긍정’만 하면 만사형통의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자기의 열심 없이 로또에 인생의 명운을 건 도박 중독자가 자신의 오류를 자각하지 못하는 현상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오직 믿음’이나 ‘절대 긍정’이 아닌 ‘자기 부정’에 있다. 오직 믿음이 긍정의 힘으로 오작동하여 자신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 사례들은 너무도 많다. 역사와 자신에 대한 객관적 성찰 없이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고 믿으며 모든 문제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 자폐증에 경도된 사회적 인격 장애인에 불과하다. 시대 정신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없는 맹신자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리 또한 만무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여름철의 매미가 겨울의 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대롱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려는 어리석은 짓이다. 우주 만물이 신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스라엘 사람의 시각만으로 신을 규정하려는 것, 또한 군맹무상(群盲撫象)에 불과한 어리석음이다.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하였다. ‘도(道)’를 ‘도’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도’는 우리가 인지하는 수준의 ‘도’밖에는 될 수 없는 법이다. 신을 자신의 사고에 가둬두고 독점하려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신은 목사나 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스스로 선민이라는 자가당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건전한 상식을 가진 종교인이라면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믿는 신앙과 상대가 믿는 신앙의 차이를 ‘이해’하고 다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의 신앙과 종교의 관점을 ‘자신이 정해놓은 믿음’이란 틀에 가두지 않아야 한다. 내가 믿는 신앙 외에는 모두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는 행위에 불과하다.
예수의 정신은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보장성 보험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으로 이웃과 더불어 화평하는 공동체에 대한 이웃사랑’이다. 한국 기독교는 현세의 복과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집착하기에 사회적 불의에 둔감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말았다. 삶을 구성하는 공동체의 윤리와 ‘사회 구원’을 도외시하는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예수와 거래하려는 삯꾼에 불과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친삼촌이라는 아무개 목사가 공개편지를 통하여 “김대중 선생이 없었다면 5.18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망언을 하였다. 이는 ‘불의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학살도 없었을 것’이라는 뜻으로 불의를 외면하고 독재를 옹호하자는 말과 같다. 근본주의 신학에 경도되어 ‘신학’만을 맹종하고 ‘인간학’을 도외시하였던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폐단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조카의 구원은 이미 ‘일반 은총’으로 신의 간섭이 증명되었으니 스스로 선민이라 착각하는 삼촌이야말로 삯꾼이 아니었음을 신 앞에 증명해야 할 차례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霞田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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