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복원했으며 동의보감을 발간했다. 또 창덕궁 등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32] 또 임진왜란 과정에서 한양이 생각보다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일찍부터 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지관 이의신의 견해에 따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요지인 파주의 교하로 천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묘청의 난 등의 전례를 들어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반정으로 실각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광해군은 일찍이 이의신에게 '창덕궁은 두 번이나 큰 일을 치러서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의신은 "고금(古今)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란들은 궁궐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속히 옮길 곳은 점쳐야 합니다"고 했다. 광해군은 이후에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
이의신의 주장에 신료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광해군은 이의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광해군 7년(1615년)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 대조전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경운궁)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대조전은 유암불편(有暗不便)하여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창경궁으로 옮기고 싶다'고 한 것이다. 두 궁궐을 수리, 개수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건 수리에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다들 광해군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지만 이의신이란 주술사 같은 인간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것 같아 옮겨 적어 봅니다...
광해군의 최후는 다들 아실테고...이의신의 최후는 참수형...
유행이 돌고 돌듯 역사 역시 돌고 돌아 굥과 천공의 최후를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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